초기 기독교와 전염병
펜데믹 시대에 기독교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로마에서 가장 극심한 박해 기간 중 하나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통치기를 떠올려 보자. 그 당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바로 대표적으로 역병이 있었다. 165년 가공할 역병이이 로마 제국 전역을 강타했다. 역병이 돌던 15년 동안 제국의 인구가 1/4, 1/3이 역병으로 사망했고,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180년 역병으로 사망했다. 그 후 251년에 동일한 파괴력을 지닌 역병이 다시금 제국을 휩쓸게 되었고, 농촌도 도시만큼이나 큰 타격을 입었다. 요즘도 홍역이 유행하는데, 그때 당시도 홍역으로 추정된다. 이 두 번째 전염병은 한창 심했을 때는 로마 한 곳에서만 하루에 5천 명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인간이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나갈 때 절망과 무기력에 빠진다. 당시 그들의 사상의 대표하던 소피스트들은 이 판국에 ‘세계가 늙어가며 미덕은 메말라간다’는 애매한 소리를 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달랐다. 이 당시 키프리아누스와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판국에 의미를 부여했다. 충격에 휩싸인 생존자들에게 죽은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던 것이다. 당시 역병, 질병, 폭력적 죽음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이러한 소식은 정말로 복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단순히 말뿐인 종교가 아니었다. 이 점은 생존율에서 극명하게 이교도들과 대조된다. 기독교는 역병에 걸린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이교도와는 참으로 달랐다. 오죽하면 율리아누스 황제가 사제에게 쓴 편지에 “불경한 갈릴리 사람들은 그들의 가난한 자만 돕는 게 아니라 우리의 가난한 자까지 돕는다. 누가 봐도 우리 사람들이 우리로부터 받는 도움이 부족한 것을 알 수 있다”라고 쓰기까지 했다. 이교도의 눈에 비친 이 모습이야 말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전하셨던 주님의 가르침의 실현이었다. 역병이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사랑한 것이다. 또 자신의 목숨을 버리며 우리를 사랑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구현한 것이기도 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버려진 병자들을 거두어 돌보았다. 그러다가 병에 감염되어 목숨을 잃어도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3세기 프랑스 파리의 초대 주교 디오니시우스는 이렇게 썼다.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환자들을 돌보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환자들의 필요를 돌보며 간호했다. 그리고 환자들과 함께 평화로이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그들은 환자들의 병에 감염되었어도 이웃들의 질병을 감싸 안았으며, 그들의 고통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타인들을 돌보며 치료하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환자들의 죽음을 자신들이 떠안았으며 그들 대신 죽었다.”
로마의 식민지 사람들은 세 가지-로마 시민권, 부, 안전-를 꿈꾸며 살았다. 부자가 되면 어떻게든 로마 시민권을 사려 했고 그 후엔 향락에 젖어 들었다. 사치가 만연해지면 도덕적으로 타락하기 마련이다. 쾌락에 젖어 살았지만 전염병이 돌자 사회가 일시에 정지되는 듯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선 빛이 드러나는 법. 세계 최고의 학문과 문화를 가졌던 그들이지만 전염병이 돌자 귀족들도 가족을 버렸다.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버려진 자들을 돌보며 죽어 갔다.
"로마의 전염병(Plague in Rome)" Jules-Élie Delaunay. 1869년.
그리스도인들의 과격한 사랑 실천은 로마 제국 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들에겐 경이 그 자체였다. 특히 빈자와 병자를 긍휼히 여기는 교인들의 삶을 보면서 로마인들은 당황했다. 실로 기독교가 남긴 자취와 영향력은 매우 놀라웠다. 주후 250년이 되자 수도 로마에서 그리스도인의 수가 5만 명으로 불어났다. 4세기 초엔 로마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그리스도인이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로마 황제도 힘으로 침묵시킬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로드니 스타크 교수는 이것을 통계로 보여 준다. 즉 주후 40년 당시 그리스도인의 수를 1천 명으로 가정한 뒤, 10년마다 40퍼센트(연 3.42%) 씩 성장했다고 추정해 보자. 이런 가정을 토대로 계산해 보니 주후 100년에 그리스도인의 수는 7,530명이었고, 로마 제국 인구 중 0.0126퍼센트였다. 주후 200년경 그리스도인의 수는 21만 7천 명이고, 제국 내 비율은 0.36퍼센트가 되었을 것이다. 또 주후 250년에 그리스도인의 비율은 1퍼센트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후 300년에는 629만 명이 되었고, 비율은 10.5퍼센트에 다다랐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한 사회학자의 추정이지만, 초기 기독교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놀랍게 성장했다. 특히 3세기는 역사가들이 ‘피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순교자가 많았다. 사자의 밥이 되고 몸에 기름이 발라져 횃불처럼 불타 죽으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순교자들을 지켜본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담대한 믿음을 궁금해했다. 결국 자신들도 전염병으로 죽음을 맞게 되자 그리스도인을 찾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이교도들의 대책은 이랬다. 역병 시대 갈레노스라는 의사가 잽싸게 로마에서 빠져나와 위험이 잦아들 때까지 소아시아의 시골집에 은신해 있었다. 하지만 이 갈레노스는 후대에까지 존경 받던 당대 최고의 의사였다. 그 당대의 갈레노스 같은 행보가 사실 그렇게 크게 지탄받을 일이 아니었다. 능력과 신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일이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달랐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약자를 돌보고 사랑과 친절을 베푸는 우리의 모습은 많은 우리 반대자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브랜드다. ‘한 번만 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지 보라!”
이 차이가 생존율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로마 최고의 의사는 발병자와 일체의 접촉을 피하라고 권했다. 기독교는 병든 자를 간호하라는 지침을 따랐다. 그렇기에 이교도와 이교도 사이의 생존율은 25%라면 기독교인과 기독교인 사이의 생존율은 81%였다. 기독교인이 자신들만 간호했던 것이 아니라 이교도들도 간호했기에 치료받은 그들은 생존율도 제법 높았다.
* 카리안 님의 책 이야기에서 발췌한 글에 첨언하여 정리하였습니다. 원글은 아래 카리안님의 티스토리에서 확인하시면 더 많은 정보를 보실 수 있습니다.
출처: https://kuyrian.tistory.com/222 [카리안의 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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