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리는대로읽는성경

플라시보와 믿음 사이

반대정신 2020. 4. 4. 16:46

플라시보와 믿음 사이

만성자궁출혈로 힘들어하던 그녀는 플라시보보다 예수의 능력을 믿었다

 

 

5: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5: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5: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5: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5: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5: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5: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5: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5: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5: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5: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5: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5: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5: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누가복음 5장 21-34절)

 

 

회당장이 왜 저래?

야이로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건 그가 회당장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엎드렸다는 점이다. 회당장이면 바리새파이면서 회당 관리자 중에서도 높은 위치에 있고, 권력도 가진 지위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점에서 회당장이 나사렛 촌구석의 소위 듣보라고 여겨질 만한 인물에게 엎드린다는 것이 유대 사회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의 12살 짜리 딸을 살리기 위해 그는 자신의 지위와 체면을 모두 내던졌고, 예수가 딸의 병을 낫게 해줄 수 있는 분이라는 굳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예수의 반응도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에서 단적으로 보여주듯 그의 진심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혈우병을 앓는 여인(The Woman with an Issue of Blood). 자메 티소트.  1886-1896. Opaque watercolor over graphite on gray wove paper. 27.9 x 17.9 cm. Brooklyn Museum.

 

혈루증? 혈우병?

당시 사람들이 예수가 가는 곳마다 매우 많은 숫자가 따라다녔는데, 혈루증 앓는 여인도 함께였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 혈루증을 혈우병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분명 그리 배운 듯한데...) 어쨌든 제대로 배운 게 아니라 어설프게 성경을 안다고 생각했던 오만함 때문이다. 혈루증은 만성 자궁출혈이라고 한다. 유대 사회에서 혈루증을 부정하다고 보았다는 점은 생리를 부정하는 보는 연장선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레위기의 율법(레위기 15장)을 통해 보듯이 아마도 12년동안 자궁출혈로 힘들어했을 이 여인은, 육체의 질병으로 인한 괴로움보다 '부정하게'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선과 세상과의 격리가 더더욱 절망스러웠다.

 

생리 혐오

불현듯 지난 번에 네팔에서 생리하는 두 아이의 엄마를 부정하다면 집밖으로 내쫓았는데, 불행하게도 두 아들과 함께 집밖 움막에서 추위와 싸우던 세 모자가 안타깝게 사망한 뉴스가 기억난다.

 

http://news1.kr/articles/?3521117

 

그런데 이게 단지 네팔 지역만이 아니라 인도를 비롯한 힌두교, 중동과 아프리카의 이슬람, 유대교까지 여성의 생리를 혐오하고 부정하게 보는 악습이 남아 있는 듯하다. 오래 전 장로회 내 합똥교단이라는 곳의 신학교에서 한 나이 많은 목사가 설교 시간에 "어디 여자가 기저귀 차고 강단에 올라와!"라는 어이없는 말을 한 기억난다. 시쳇말로 돌로 쳐죽일 자는 이런 자가 아닌가? 그런 판단력으로 목사가 되었다니, 목사고시를 그렇게 대충하는지 궁금하다.

 

부정한 병

어쨌든 혈루증 앓는 여인은 부정하다는 시선과 함께 온갖 수모를 겪었을 것이고, 여러 의사들에게 자신의 치부를 보이고 재산을 탕진해 가면서 치료를 했음에도 오히려 병이 악화되었다고 한다. 그런 인생의 막다른 절벽 앞에 있던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예수의 옷깃만 잡아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절망적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잡을 수 있는 희망의 자락이었다. 물론 수많은 인파를 뚫고 사회적 편견을 받아야 했던 그녀가 에수에게 다가가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여인은 죽을 용기를 내어 나아갔다. 그래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니 혈루의 근원이 마르고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인지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플라시보? 아니 능력!

혹자들은 이게 플라시보 효과라고 할지 모르겠다. 플라시보라고 정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긍정 심리학이 가져다 준 가치들을 나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플라시보로 설명할 수 없는 점이 "그 능력이 자기에게 나간 줄을 곧 아시고"라는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치유의 능력과 권세가 그분에게 있기 때문이다. 플라시보가 긍정적인 믿음으로 환자에 의해 좌우된다면, 혈루증 앓는 여인의 치유는 예수님의 능력에 의해 좌우된 것이다. 아마도 이는 상징적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행동이 아닐까? 충분히 말씀만으로도 여인을 치료하실 수 있지만, 옷깃을 잡는 상징적인 장면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의 권능을 무리들에게 보여주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말씀하신다. 옷깃만 잡아도 나을 수 있겠다는, 지금의 상식으로 판단했을 때는 어리석어 보이는 믿음조차도 예수님은 귀하게 보신 것이다.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은 얼마나 기뻤을까? 사회적 모멸로 점철된 지금까지의 인생이 한순간에 바뀌었으니까. 비관적이고 우울했을 여인은 라틴어 플라시보(placebo)의 뜻처럼 기쁨을 얻게 되었다.